서진강 36회
자랑스러운 남편의 예복
나의 남편, 정일영(1926~2015)박사는 1951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타운대 학교, 영국 런던대학교를 거쳐 1959년 스위스 제네바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1960년 부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냈다. 우리는 1948년 남편의 대학교 졸업 전에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 바로 6.25전쟁을 겪었고 나는 살림과 세 딸의 육아로 남편의 유학 생활은 함께 하지 못했다.
1962년에 남편이 주 프랑스 대한민국 공사로 발령을 받아 가족이 함께 외국에 갈 수 있었기에 우리 가족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누구나 근무하고 싶은 나라! 프랑스는 모든 것이 매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프랑스로 가기 전에 이번에 기증한 남편의 예복들과 실크 모자 등 일습을 준비하고, 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의 부인으로서 그곳에서 만찬 등 각 의식에 맞는 한복 십여 벌을 마련했다. 1960년대에는 대한민국, 코리아를 아는 외국인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우리나라를 알리고 소개할 사명감을 갖고 우리 문화를 나타낼 수 있는 가구들과 집을 장식할 병풍, 자개 장식품, 그림, 특히 겸재 정선과 표암 강세황의 고화 등을 갖추었다. 관저로 외국인들을 초대할 때 우리 고유의 은수저, 신선로, 은주전자, 구절판 등 식기류에 여러가지 한식을 준비하여 보기 좋고 맛도 있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최전방에 있는 외교관의 안주인으로서 나의 역할에 최선을 다 했다고 자부한다.
실크햇(Silk Hat), 1960-70년대
모닝코트(Morning Coat), 1960-70년대
주재국에서는 오찬, 만찬 등의 의식에 참석할 초대장에 그날 입어야 하는 예복이 명시되어 있었다. 나는 언제나 우리의 전통 한복을 상황에 맞추어 색깔을 골라서 입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의 화려한 드레스에 비해 늘 우리의 한복이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다.
1966년에서 1971년까지 주 스위스 대사로 재임할 때에는 오스트리아와 로마 교황청 대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당시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신임장을 전달하러 로마에 갔을 때의 일이다. 교황은 정일영 대사에게 자신이 대한민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정일영 대사는 대한민국에 천주교인들이 다수 있으나 한국 추기경이 아직 없으니 추기경을 임명해 주십사고 말씀드렸고 교황은 이를 수락했다.
이어 1969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김수환 대주교를 대한민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하였고 대사로서 아주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주 벨기에 대사, 주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남편은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 초대원장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9-10대 국회의원, 국민대학교 총장 등 나라의 성실한 일꾼으로서 훈장과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나는 일제 강점기에 여고 생활을 보냈는데, 그때는 바느질, 자수, 뜨개질 등을 학교에서 배웠다. 해방될 당시 경기여고생들은 현재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던 장소에서 일본 군인들의 군복을 수선하고 있을 때 일본 천황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함께 있던 친구들과 함성을 지르며 만세를 외치던 역사적인 순간들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자수에 취미가 좀 있어서 결혼 준비로 겨울용 여름용 상보, 베갯잇 등을 만들었다. 누비 한복 일습은 외손자 며느리가 시집올 때 할머니 예단으로 보낸 귀한 옷들이다.
내 나이 아흔이 넘어 주변 정리를 하면서 남편의 역사가 담긴 예복과 함께 내가 직접 수놓은 혼수품 등을 경운박물관에 기증할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경기여고와 경운박물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나의 남편, 정일영(1926~2015)박사는 1951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타운대 학교, 영국 런던대학교를 거쳐 1959년 스위스 제네바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1960년 부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냈다. 우리는 1948년 남편의 대학교 졸업 전에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 바로 6.25전쟁을 겪었고 나는 살림과 세 딸의 육아로 남편의 유학 생활은 함께 하지 못했다.
1962년에 남편이 주 프랑스 대한민국 공사로 발령을 받아 가족이 함께 외국에 갈 수 있었기에 우리 가족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누구나 근무하고 싶은 나라! 프랑스는 모든 것이 매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프랑스로 가기 전에 이번에 기증한 남편의 예복들과 실크 모자 등 일습을 준비하고, 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의 부인으로서 그곳에서 만찬 등 각 의식에 맞는 한복 십여 벌을 마련했다. 1960년대에는 대한민국, 코리아를 아는 외국인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우리나라를 알리고 소개할 사명감을 갖고 우리 문화를 나타낼 수 있는 가구들과 집을 장식할 병풍, 자개 장식품, 그림, 특히 겸재 정선과 표암 강세황의 고화 등을 갖추었다. 관저로 외국인들을 초대할 때 우리 고유의 은수저, 신선로, 은주전자, 구절판 등 식기류에 여러가지 한식을 준비하여 보기 좋고 맛도 있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최전방에 있는 외교관의 안주인으로서 나의 역할에 최선을 다 했다고 자부한다.
실크햇(Silk Hat), 1960-70년대
모닝코트(Morning Coat), 1960-70년대
주재국에서는 오찬, 만찬 등의 의식에 참석할 초대장에 그날 입어야 하는 예복이 명시되어 있었다. 나는 언제나 우리의 전통 한복을 상황에 맞추어 색깔을 골라서 입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의 화려한 드레스에 비해 늘 우리의 한복이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다.
1966년에서 1971년까지 주 스위스 대사로 재임할 때에는 오스트리아와 로마 교황청 대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당시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신임장을 전달하러 로마에 갔을 때의 일이다. 교황은 정일영 대사에게 자신이 대한민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정일영 대사는 대한민국에 천주교인들이 다수 있으나 한국 추기경이 아직 없으니 추기경을 임명해 주십사고 말씀드렸고 교황은 이를 수락했다.
이어 1969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김수환 대주교를 대한민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하였고 대사로서 아주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주 벨기에 대사, 주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남편은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 초대원장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9-10대 국회의원, 국민대학교 총장 등 나라의 성실한 일꾼으로서 훈장과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나는 일제 강점기에 여고 생활을 보냈는데, 그때는 바느질, 자수, 뜨개질 등을 학교에서 배웠다. 해방될 당시 경기여고생들은 현재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던 장소에서 일본 군인들의 군복을 수선하고 있을 때 일본 천황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함께 있던 친구들과 함성을 지르며 만세를 외치던 역사적인 순간들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자수에 취미가 좀 있어서 결혼 준비로 겨울용 여름용 상보, 베갯잇 등을 만들었다. 누비 한복 일습은 외손자 며느리가 시집올 때 할머니 예단으로 보낸 귀한 옷들이다.
내 나이 아흔이 넘어 주변 정리를 하면서 남편의 역사가 담긴 예복과 함께 내가 직접 수놓은 혼수품 등을 경운박물관에 기증할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경기여고와 경운박물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