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신 45회
송옥양장점의 탄생
해방 전에 어머니(오송죽 吳松竹)는 여고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심명언 沈明彦)와 결혼하신 후 일본 디자인 학교에서 뒤늦게 디자인 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옷 만드는 것을 좋아하셔서 우리들 어렸을 때 예쁜 원피스를 손수 만들어서 입혔습니다. 그때는 어린이들도 한복을 많이 입을 때라 우리들이 입은 옷이 동네에서 유명해졌습니다. 주문도 들어왔습니다. 그 때부터 어머니의 의상에 대한 열정이 특별했습니다.
해방 후 종로에서 어머니 성함 중 송(松)자와 집 옥(屋)자를 쓴 송옥(松屋)양장점이 탄생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성복이 없었기에 송옥의 맞춤 의상은 소문에 소문을 타서 서울의 멋쟁이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몇 년 후에 6.25전쟁이 나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나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치수를 재는 줄자 하나를 챙겨 들고 할머니, 큰집 식구, 우리 식구 12명의 대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생소한 부산에서 많은 식구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답니다. 항상 의상에 대한 열정으로 사셨던 어머니는 부산에서도 의상실을 열기로 하고 발이 부르트도록 마땅한 장소를 찾아 다니셨습니다. 운 좋게 부산의 중심지인 광복동에서 송옥을 다시 열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송옥이 왔다니까 부산 멋쟁이, 서울에서 피난 온 분들이 모여들어서 주문받은 옷을 다 만들어 낼 수 없을 정도로 번창하였습니다.
서울 수복 후에는 마침내 명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맞춤복은 물론 여학생 교복까지 하게 되어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어머니는 맏딸인 나와 동대문 광장시장에 가서 옷감 사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시장을 돌면서 좋은 옷감을 고르는 안목이 대단하셨습니다. 송옥 사장님이 어떤 옷감을 사는지, 어떤 단골집에 가는지, 주위의 관심이 대단했고 어머니가 고른 옷감은 곧 유행이 되곤 했습니다. 수입 옷감 도 썼지만 그 당시 한국 방직회사에서 품질 좋은 옷감들을 생산해 내서 국산 옷감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화려한 파티복보다는 예쁜 프린트 원피스, 오버코트, 투피스 등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일상복을 주로 만드셨습니다. 오시는 손님마다 어머니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입고 계신 옷을 가져가신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오버코트를 오랫동안 잘 입다가 딸에게까지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송옥에 오던 손님 중에서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분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드레스를 여러 벌 준비하고 뒷바라지를 하셔서 미스 한국일보에 당선된 일도 있었습니다. 예쁜 레이스 등으로 드레스를 만들었는데 안타깝게도 사진이 없습니다.
어머니께서는 11남매(딸 아홉, 아들 둘)를 키우면서 가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고 일에 자부심을 갖고 항상 의상디자인을 생각하며 사는 신여성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11남매 중 하나라도 어머니 뒤를 이어서 기성복까지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나 바쁜 어머니를 보며 어머니 뒤를 이을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 삶이 너무 힘들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아직도 송옥을 기억해주시고 미인이셨던 어머니도 기억해 주십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어머니와 함께 일을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여성양장의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어머니는 수퍼우먼이셨지만 이 모든 것을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내지 못하셨을 겁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두 분은 잉꼬부부셨습니다.
이번 전시되는 옷들은 미국에 사는 동생들 심금자, 심영자가 보내온 옷 것입니다. 어머니 옷을 아직까지 소중하게 간직한 동생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지금도 입고 싶어지는 옷들입니다. 어머니는 딸들하고 지내는 시간을 무척 즐거워하셨습니다. 다섯 딸들이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에도 가끔 가셔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옛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서 사라져 가는 송옥의 옷을 잘 손질해서 전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세상에 계신 부모님들이 기뻐하실 겁니다.
해방 전에 어머니(오송죽 吳松竹)는 여고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심명언 沈明彦)와 결혼하신 후 일본 디자인 학교에서 뒤늦게 디자인 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옷 만드는 것을 좋아하셔서 우리들 어렸을 때 예쁜 원피스를 손수 만들어서 입혔습니다. 그때는 어린이들도 한복을 많이 입을 때라 우리들이 입은 옷이 동네에서 유명해졌습니다. 주문도 들어왔습니다. 그 때부터 어머니의 의상에 대한 열정이 특별했습니다.
해방 후 종로에서 어머니 성함 중 송(松)자와 집 옥(屋)자를 쓴 송옥(松屋)양장점이 탄생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성복이 없었기에 송옥의 맞춤 의상은 소문에 소문을 타서 서울의 멋쟁이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몇 년 후에 6.25전쟁이 나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나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치수를 재는 줄자 하나를 챙겨 들고 할머니, 큰집 식구, 우리 식구 12명의 대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생소한 부산에서 많은 식구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답니다. 항상 의상에 대한 열정으로 사셨던 어머니는 부산에서도 의상실을 열기로 하고 발이 부르트도록 마땅한 장소를 찾아 다니셨습니다. 운 좋게 부산의 중심지인 광복동에서 송옥을 다시 열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송옥이 왔다니까 부산 멋쟁이, 서울에서 피난 온 분들이 모여들어서 주문받은 옷을 다 만들어 낼 수 없을 정도로 번창하였습니다.
서울 수복 후에는 마침내 명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맞춤복은 물론 여학생 교복까지 하게 되어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어머니는 맏딸인 나와 동대문 광장시장에 가서 옷감 사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시장을 돌면서 좋은 옷감을 고르는 안목이 대단하셨습니다. 송옥 사장님이 어떤 옷감을 사는지, 어떤 단골집에 가는지, 주위의 관심이 대단했고 어머니가 고른 옷감은 곧 유행이 되곤 했습니다. 수입 옷감 도 썼지만 그 당시 한국 방직회사에서 품질 좋은 옷감들을 생산해 내서 국산 옷감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화려한 파티복보다는 예쁜 프린트 원피스, 오버코트, 투피스 등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일상복을 주로 만드셨습니다. 오시는 손님마다 어머니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입고 계신 옷을 가져가신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오버코트를 오랫동안 잘 입다가 딸에게까지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송옥에 오던 손님 중에서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분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드레스를 여러 벌 준비하고 뒷바라지를 하셔서 미스 한국일보에 당선된 일도 있었습니다. 예쁜 레이스 등으로 드레스를 만들었는데 안타깝게도 사진이 없습니다.
어머니께서는 11남매(딸 아홉, 아들 둘)를 키우면서 가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고 일에 자부심을 갖고 항상 의상디자인을 생각하며 사는 신여성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11남매 중 하나라도 어머니 뒤를 이어서 기성복까지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나 바쁜 어머니를 보며 어머니 뒤를 이을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 삶이 너무 힘들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아직도 송옥을 기억해주시고 미인이셨던 어머니도 기억해 주십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어머니와 함께 일을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여성양장의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어머니는 수퍼우먼이셨지만 이 모든 것을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내지 못하셨을 겁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두 분은 잉꼬부부셨습니다.
이번 전시되는 옷들은 미국에 사는 동생들 심금자, 심영자가 보내온 옷 것입니다. 어머니 옷을 아직까지 소중하게 간직한 동생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지금도 입고 싶어지는 옷들입니다. 어머니는 딸들하고 지내는 시간을 무척 즐거워하셨습니다. 다섯 딸들이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에도 가끔 가셔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옛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서 사라져 가는 송옥의 옷을 잘 손질해서 전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세상에 계신 부모님들이 기뻐하실 겁니다.
기증소장품
원피스일상복 | 광복이후
기증 소장품
원피스일상복 | 광복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