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치마에 금박 찍힌 자주색 당의, 이 옷은 어머니(이혜자 32회)께서 1988년에 신사임당 상을 받을 때 입으셨던 옷이다. 어머니가 1925년생이니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이 상을 받으셨다. 지금도 이 옷을 보면 당시 이 옷을 입고 환히 웃으며 시녀들 사이에 앉아계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중에는 딸들로 불린 이 분들은 어머니와 함께 뽑힌 젊은 신사임당들이었다. 스스로를 88클럽이라고 불렀던 그 딸들은 어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모녀관계를 유지하면서 때마다 찾아뵙고 우리 어머니를 진짜 어머니처럼 모셨다.
이런 관계가 말해주듯이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엄마같은 사랑을 베푸는 분이셨다. 어머니는 당시 그림과 붓글씨를 사랑하고 탁구도 열심히 치는 이른바 꽃중년이셨다. 5남매를 훌륭하게 키운 전통적인 현모양처 상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을 받으신 것이지만, 어머니가 이 상에 합당한 것은 무엇보다도 모성적 사랑의 실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사랑에서 본받을 점은 특히 그 ‘공정함’이다. 어머니는 딸, 아들, 외손, 친손 모두 동등하게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어주시고자 노력하셨다. 어머니가 살아 온 가부장적 시기에 그만큼 공정한 사랑을 실천한 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정 밖에서도 어머니의 성품은 변함이 없었다. 모든 친구들을 아우르려 노력하였고, 경기여고 동창회장(22, 23대) 혹은 여류탁구동우회 회장직을 수행할 때도 구성원들을 골고루 배려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많은 분들이 문상을 오셨는데 그 분들의 추억 속에 어머니는 하나같이 따뜻하고 바른 분으로 기억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이러한 공정한 사랑이 수많은 기부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면서 A4 용지 몇 장에 빽빽하게 손수 적어 놓으신 기부 기록을 발견하였다. 그 양에도 놀랐지만 정확한 기록을 남기려는 치밀함에도 감탄했다. 본인과 관련된 사회 각처에 고른 분배를 하겠다는 의지가 이런 기록을 남기게 한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드리는 용돈을 기부금으로 써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사실 당신의 것으로 하신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 대한 고마움을 먼저 챙기신 것이다. 이 삭막한 시대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지만 ‘공정하게’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나는 어머니의 삶에서 그 모범을 보았다. 내가 어머니를 사랑할 뿐 아니라 존경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런 모습 때문이다.
지금도 ‘어머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봄을 알리는 분홍빛 벚꽃. 어머니가 특히 벚꽃을 그리고 분홍빛을 좋아하셨고 또 분홍 옷을 즐겨 입으시기도 했지만, 넉넉한 미소로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한 사랑을 나누어주는 모습이 벚꽃을 참 많이 닮으셨다고 생각한다. 산들 바람에 흩날리며 온 천지를 따뜻한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벚꽃을... 그러고 보니 나는 어머니와 벚꽃놀이도 참 많이 다녔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2년이 되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3월 말이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른 다음 날 나는 정동 길에서 그 해 처음으로 벚꽃 꽃망울을 보았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가슴으로부터 치미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의 그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꽃망울이 머금은 야무진 생명력, 그것을 비추는 눈부신 햇살이 오히려 나를 먹먹한 덧없음으로 이끌었다. 다시는 뵐 수 없는 그 분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