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희 51회
외할머니의 솜씨
경운박물관에 기증한 한복과 소품들은 나의 외할머니가 평생 간직해 오셨던 것들이다. 돌이켜 보면 외할머니는 살아생전에 틈만 나면 바느질을 하시거나 장롱 서랍 정리를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가끔, 이번에 함께 기증한 두 개의 큼지막한 버들고리짝 속에 든 옷들을 꺼내어 거풍하거나 매만져서 구김살 하나 없이 반듯하게 넣어두시곤 했다.
나는 외할머니와의 애틋한 기억을 숱하게 갖고 있다. 외할머니는 1904년생으로 함자는 장태랑(張太娘), 2003년에 100세로 돌아가셨는데 그 흔한 성인병이나 치매도 없으셨고, 돌아가시기 3주일쯤 전에 갑자기 가슴의 통증으로 입원하셨을 때만 해도 유학 간 외증손자의 안부를 물으실 만큼 총기가 좋으셨다. 여름이면 하얀 모시적삼에 노르끼한 생모시치마를 즐겨 입으시던 모습만큼이나 곱고 정갈하게 사셨던 분이다. 슬하에 남매를 두셨고, 외할아버지(朴喆俊)는 일제 때 인천삼일만세운동의 주역(인천창영초등학교 교정에 기념비가 서있음)이셨는데 옥고를 치르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으므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으리라 짐작된다.
비록 외할머니는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셨으나 삯바느질로 나의 친정어머니를 경성사범, 외삼촌은 인천사범에 보내셨다. 그뿐 아니라 외손녀인 내가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경기여중에 진학하자 학교 바로 앞에 방을 얻어 밥을 해 주셨던 분이다. 여름이면 교복을 하얗게 삶아 빨아서 풀 먹여 다 마르기 전에 물 뿜어 꼭꼭 밟았다가 빨갛게 달군 숯을 넣은 다리미로 쭉살 하나 없이 다려 입혀 주셨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무남독녀 나 하나만을 낳으셨고 평생 동안 병치레를 하시느라 외할머니의 보살핌이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모녀 3대가 한 집에서 긴 세월을 살게 된 것이다.
재작년 겨울 「그리운 저고리」전시회는 벼르고 벼르다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출품된 외할머니의 솜씨를 볼 수 있었다. 그때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된 2장의 흑백 사진은 가슴이 뭉클한 감격을 안겨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장은 친정어머니의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고, 또 하나는 6.25 전쟁 후에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사진 속에 외할머니가 입고 계신 양단저고리는 외할아버지가 장만해주셨던 것으로 평생 간직하고 고쳐 지어 입으셨으며 경운박물관에 기증되기까지 했다. 외할머니는 나의 친정어머니를 시집보내면서 혼수를 종류별로 정성껏 마련하셨는데 전쟁 통에 대부분 잃어버리셨다지만 그래도 외할아버지의 옷이 남아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전시된 가족사진속에 친정어머니가 입은 곱슬곱슬한 양털이 들어간 짙은 남색 양단배자는 밀가루를 뿌렸다가 털어내는 방법으로 양털의 더러움을 제거하곤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갈색이 고운 양단 두루마기는 비단솜을 넣고 손수 옥색 물감을 들인 명주를 안감으로 하여 지으신 것으로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입으시던 옷이다.
또 조바위와 명주로 된 숄은 겨울철이면 외할머니가 나들이 할 때 즐겨 쓰시던 것들이다. 외할머니의 바느질 솜씨와 무엇이든 깔끔하게 정리정돈하시고 물건을 아껴서 쓰시던 솜씨는 참으로 어느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박물관에 기증한 옷뿐만 아니라 작은 소품하나 하나마다 외할머니의 손길이 닿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립고 애틋해서 마음이 아파온다.
경운박물관에 기증한 한복과 소품들은 나의 외할머니가 평생 간직해 오셨던 것들이다. 돌이켜 보면 외할머니는 살아생전에 틈만 나면 바느질을 하시거나 장롱 서랍 정리를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가끔, 이번에 함께 기증한 두 개의 큼지막한 버들고리짝 속에 든 옷들을 꺼내어 거풍하거나 매만져서 구김살 하나 없이 반듯하게 넣어두시곤 했다.
나는 외할머니와의 애틋한 기억을 숱하게 갖고 있다. 외할머니는 1904년생으로 함자는 장태랑(張太娘), 2003년에 100세로 돌아가셨는데 그 흔한 성인병이나 치매도 없으셨고, 돌아가시기 3주일쯤 전에 갑자기 가슴의 통증으로 입원하셨을 때만 해도 유학 간 외증손자의 안부를 물으실 만큼 총기가 좋으셨다. 여름이면 하얀 모시적삼에 노르끼한 생모시치마를 즐겨 입으시던 모습만큼이나 곱고 정갈하게 사셨던 분이다. 슬하에 남매를 두셨고, 외할아버지(朴喆俊)는 일제 때 인천삼일만세운동의 주역(인천창영초등학교 교정에 기념비가 서있음)이셨는데 옥고를 치르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으므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으리라 짐작된다.
비록 외할머니는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셨으나 삯바느질로 나의 친정어머니를 경성사범, 외삼촌은 인천사범에 보내셨다. 그뿐 아니라 외손녀인 내가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경기여중에 진학하자 학교 바로 앞에 방을 얻어 밥을 해 주셨던 분이다. 여름이면 교복을 하얗게 삶아 빨아서 풀 먹여 다 마르기 전에 물 뿜어 꼭꼭 밟았다가 빨갛게 달군 숯을 넣은 다리미로 쭉살 하나 없이 다려 입혀 주셨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무남독녀 나 하나만을 낳으셨고 평생 동안 병치레를 하시느라 외할머니의 보살핌이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모녀 3대가 한 집에서 긴 세월을 살게 된 것이다.
재작년 겨울 「그리운 저고리」전시회는 벼르고 벼르다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출품된 외할머니의 솜씨를 볼 수 있었다. 그때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된 2장의 흑백 사진은 가슴이 뭉클한 감격을 안겨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장은 친정어머니의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고, 또 하나는 6.25 전쟁 후에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사진 속에 외할머니가 입고 계신 양단저고리는 외할아버지가 장만해주셨던 것으로 평생 간직하고 고쳐 지어 입으셨으며 경운박물관에 기증되기까지 했다. 외할머니는 나의 친정어머니를 시집보내면서 혼수를 종류별로 정성껏 마련하셨는데 전쟁 통에 대부분 잃어버리셨다지만 그래도 외할아버지의 옷이 남아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전시된 가족사진속에 친정어머니가 입은 곱슬곱슬한 양털이 들어간 짙은 남색 양단배자는 밀가루를 뿌렸다가 털어내는 방법으로 양털의 더러움을 제거하곤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갈색이 고운 양단 두루마기는 비단솜을 넣고 손수 옥색 물감을 들인 명주를 안감으로 하여 지으신 것으로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입으시던 옷이다.
또 조바위와 명주로 된 숄은 겨울철이면 외할머니가 나들이 할 때 즐겨 쓰시던 것들이다. 외할머니의 바느질 솜씨와 무엇이든 깔끔하게 정리정돈하시고 물건을 아껴서 쓰시던 솜씨는 참으로 어느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박물관에 기증한 옷뿐만 아니라 작은 소품하나 하나마다 외할머니의 손길이 닿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립고 애틋해서 마음이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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