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애 54회
증손부에게 남겨주신 물건들
그 소중함을 기억하며
나의 시댁은 울산 김씨로 멀리는 태종의 '형제의 난'에 장성으로 피신한 민씨 할머니를 중시조로 하며 중종 때 인종의 스승으로 호남 유일의 성균관에 문묘 배향된 김인후 선생의 자손으로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계신 집안이다. 그리고 4대 조부께선 성리학자로 규장각에 보존된 몇 권의 저서도 내시고 정삼품까지 오르신 분이다.
내가 결혼하기 전부터 4대 봉제사를 하시며 한 해 11번의 제사를 치르고 계셨는데 시조부께서 돌아가신 후부터는 4대를 합제로 해 8, 9분을 같이 한 번에 모시고있다. 설과 추석 차례와 한 번의 큰 제사로 한 해 세 차례 행사로 세 동서가 정성껏 지내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코로나 팬데믹이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설, 추석 두 번의 차례는 아우들 각각의 집에서 지내고 기제사에만 대소가 모두 모여야 할 듯 하다.
나는 시조부님이 귀해 마지않는 맏손자의 배우자여서 종손부로 여러모로 존중 받는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는데 삼십여 년 모신 시숙모 조차 섭섭해 하실 때도 있었다. 자리의 책임감 때문인지 나도 집안 대소사를 정성을 다해 받들게 됐다.
원삼, 1945년
도투락댕기, 1945년
'승구' 라고 이름을 수놓은 주머니, 1940년대
해방 후 시조부께서 장남(시부모님) 혼사에 소목 장인을 집으로 불러들여 며느리와 따님을 위해 장롱 두 채를 만들어 주셨다는데 시모님은 그 장롱을 돌아가실 때까지 70여 년 간 소중히 갖고 계셨다.
2020년 음력 정월 초사흘에 96세로 영면하신 시모님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손때 묻은 가구며 살림살이 등을 어찌할까 고민이 되었다. 평소에 무심코 봐왔던 장롱을 가까이 보니 나의 일천한 안목으로도 장롱 전면의 조각들이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어떻게든 내가 갖고 와 조금 더 감상하며 보존하고 싶었으나 우리 집 식구들은 집이 좁다며 낡은 가구로 치부해버려 아주 난감한 상황이 됐고 한동안 속을 끓였다.
마침 경운박물관에서 근현대 시기 유물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 해서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장롱은 내 차지가 되고 나머지 유품들은 박물관으로 가게 됐다.
1974년도에 캐나다로 유학가는 시누이와 함께 전통 한복을 입고 한국의 멋을 자랑하셨던 시조부님의 고운 모시 두루마기와 솜을 놓고 명주 안감을 넣어 지은 검정 두루마기, 시부모님 혼사에 쓰인 원삼과 청 홍 가선을 두른 돗자리, 시부님의 활, 화살과 화살통 등 활쏘기 도구 일습, 시모님의 한복과 갖가지 옷감들, 남편의 이름까지 수놓아진 돌 복 일습, 대나무 살로 짠 차양 발 등이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크고 작은 오지 항아리 8개도 운 좋게 100주년 기념관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작년 여름 매우 더운 날씨에 동기회 배방훈 회장은 먼 거리를 마다 않고 박물관 관장님과 부관장님을 모시고 왔다. 켜켜이 묵은 먼지 속에서도 관심 있는 물건들을 고르시고 설명도 해주시어 감사했다. 옛사람들의 손때 묻은 물건들이 맞춤한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뿌듯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비록 서민들의 생활용품이라도 정성을 다해 섬세하게 만들어진 옛 장인들의 솜씨를 보면 감동스럽고 우리 문화의 우월함에 우쭐해지기도 한다. 이번 나의 기증으로 내 청소년 시절을 반짝이도록 이끌어 준 모교에 작은 갚음이 되었기를 소망해본다.
여아 색동저고리(앞), 1940년대
여아 색동저고리(뒤), 1940년대
가족사진, 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필자, 2017년
나의 시댁은 울산 김씨로 멀리는 태종의 '형제의 난'에 장성으로 피신한 민씨 할머니를 중시조로 하며 중종 때 인종의 스승으로 호남 유일의 성균관에 문묘 배향된 김인후 선생의 자손으로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계신 집안이다. 그리고 4대 조부께선 성리학자로 규장각에 보존된 몇 권의 저서도 내시고 정삼품까지 오르신 분이다.
내가 결혼하기 전부터 4대 봉제사를 하시며 한 해 11번의 제사를 치르고 계셨는데 시조부께서 돌아가신 후부터는 4대를 합제로 해 8, 9분을 같이 한 번에 모시고있다. 설과 추석 차례와 한 번의 큰 제사로 한 해 세 차례 행사로 세 동서가 정성껏 지내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코로나 팬데믹이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설, 추석 두 번의 차례는 아우들 각각의 집에서 지내고 기제사에만 대소가 모두 모여야 할 듯 하다.
나는 시조부님이 귀해 마지않는 맏손자의 배우자여서 종손부로 여러모로 존중 받는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는데 삼십여 년 모신 시숙모 조차 섭섭해 하실 때도 있었다. 자리의 책임감 때문인지 나도 집안 대소사를 정성을 다해 받들게 됐다.
원삼, 1945년
도투락댕기, 1945년
'승구' 라고 이름을 수놓은 주머니, 1940년대
해방 후 시조부께서 장남(시부모님) 혼사에 소목 장인을 집으로 불러들여 며느리와 따님을 위해 장롱 두 채를 만들어 주셨다는데 시모님은 그 장롱을 돌아가실 때까지 70여 년 간 소중히 갖고 계셨다.
2020년 음력 정월 초사흘에 96세로 영면하신 시모님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손때 묻은 가구며 살림살이 등을 어찌할까 고민이 되었다. 평소에 무심코 봐왔던 장롱을 가까이 보니 나의 일천한 안목으로도 장롱 전면의 조각들이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어떻게든 내가 갖고 와 조금 더 감상하며 보존하고 싶었으나 우리 집 식구들은 집이 좁다며 낡은 가구로 치부해버려 아주 난감한 상황이 됐고 한동안 속을 끓였다.
마침 경운박물관에서 근현대 시기 유물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 해서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장롱은 내 차지가 되고 나머지 유품들은 박물관으로 가게 됐다.
1974년도에 캐나다로 유학가는 시누이와 함께 전통 한복을 입고 한국의 멋을 자랑하셨던 시조부님의 고운 모시 두루마기와 솜을 놓고 명주 안감을 넣어 지은 검정 두루마기, 시부모님 혼사에 쓰인 원삼과 청 홍 가선을 두른 돗자리, 시부님의 활, 화살과 화살통 등 활쏘기 도구 일습, 시모님의 한복과 갖가지 옷감들, 남편의 이름까지 수놓아진 돌 복 일습, 대나무 살로 짠 차양 발 등이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크고 작은 오지 항아리 8개도 운 좋게 100주년 기념관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여아 색동저고리(앞), 1940년대
여아 색동저고리(뒤), 1940년대
가족사진, 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필자, 2017년
작년 여름 매우 더운 날씨에 동기회 배방훈 회장은 먼 거리를 마다 않고 박물관 관장님과 부관장님을 모시고 왔다. 켜켜이 묵은 먼지 속에서도 관심 있는 물건들을 고르시고 설명도 해주시어 감사했다. 옛사람들의 손때 묻은 물건들이 맞춤한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뿌듯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비록 서민들의 생활용품이라도 정성을 다해 섬세하게 만들어진 옛 장인들의 솜씨를 보면 감동스럽고 우리 문화의 우월함에 우쭐해지기도 한다. 이번 나의 기증으로 내 청소년 시절을 반짝이도록 이끌어 준 모교에 작은 갚음이 되었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