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주 45회

각별했던 줄리아 비와의 기억들

영친왕비와 함께
영친왕비와 함께

969년 3월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다음해 낙선재로 영친왕비께 세배를 드리러 갔다. 난생 처음 영친왕비를 뵙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이구 황세손(나의 삼종숙부)과 줄리아 비가 함께 있었다. 맹현 할아버지 이달용(고종의사촌이신 완순군의 아드님)의 손녀라고 인사를 드렸다. 영친왕비는 당신의 결혼식에 이왕가 대표로 참석하셨던 할아버지를 기억하시고 아주 반가워하셨다. 내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고 말씀드리니 줄리아 비가 내 옆으로 뛰어왔다.  “정말 미국에서 공부하고 왔니? 영어로 말할 수 있겠구나.” 하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후 먼 타국의 왕실 생활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외로움으로 힘들었던 줄리아

와 나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친한 사이가 되었다. 


줄리아 비는 우크라이나에서 이민 온 후손으로 미국 해군 군인으로 들어가 교육받고 뉴욕의 건축회사에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취직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미국의 MIT를 졸업하고 건축가로 같은 회사에 입사한 이구 황세손을 만났다. 두분은 사랑에 빠져 1958년도에 결혼하였으며 63년에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줄리아는 요리, 그림, 인테리어, 의상 디자인 등 재주가 많은 분이었으나 성격이 불같은 부분이 있어 조용하고 진중한 왕실의 생활을 힘들어하기도 하였다. 영친왕비가 운영하는 명휘원에서 장애인 제자를 키우며 옷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고 5,6세 된 고아를 데려와 돌보며 미국의 양부모를 찾아주는 일도 하였다. 그때 인연이 되어 은숙이란 여자아이를 입양하였다. 그러나 입양에 대한 주위의 반대로 한국에서 교육이 어려워 딸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으며 은숙은 나중에 하와이에 정착하였다. 


춘천 성심여대의 피아노 전공 교수로 일하고 있던 나는 주말이면 줄리아와 함께 음악회도 다니곤 하였다. 1970년경 독일인 피아니스트 클라우스 헬비히의 독주회에 갔을 때 독일유학을 다녀온 같은 대학의 윤창주(尹昌柱) 화학과 교수를 만나 줄리아와 인사를 시킨 일이 있다. 헬비히의 연주에 감명받은 줄리아는 헬비히와 함께 음악회에서 만났던 윤교수를 초대해 낙선재에서 저녁을 대접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줄리아가 갑자기 윤교수와 남주는 결혼해라 해서 우리 모두 무척 당황하였다. 같은 학교라 해도 전공이 달라 만날 일이 거의 없는 우리에게 당시로서는 허무맹랑한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7,8년 후에 윤교수는 내게 청혼을 하였다. 나는 결혼에 관심이 없었기에 어찌할 바를 몰라 줄리아와 제일 먼저 상의를 하였다. 처음 인사할 때부터 윤교수에게 호감이 있었던 줄리아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당장 결혼하라고 부추기며 셋이 만나 일이 정신없이 진행되었다. 우리는 1979년 1월 가회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였고 줄리아가 신부측 증인으로 섰다. 피로연도 낙선재에서 마련해 주었으니 우리 결혼에 줄리아가 큰 역할을 한 것은 틀림이 없다. 42살에 얻은 나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며 다양한 종류의 옷을 만들어 주기를 즐겨했다. 나는 아직도 줄리아가 만들어준 코트, 원피스 등 예술 작품과도 같은 다양한 옷을 애용하고 있다.

동양의 왕자와 미국 서민의 여자가 만나 계속 미국에서 살았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두 사람은 사고방식과 문화적인 차이로 힘들어했고 결국 1983년 이혼하였다. 이혼과정에서 이구 황세손은 일본으로 출국하고 변호사가 서류로 이혼 통보를 하며 동시에 줄리아가 낙선재에서 나가야 함을 알려왔다. 줄리아는 낙선재를 진심으로 사랑하였기에 이사하는 것을 가슴 아파했다. 이삿짐을 싸며 낙선재에서 쓰던 왕실그릇은 나에게 물려주었다. 내가 일상생활에 자주 사용하였던 오얏꽃 문장이 찍힌 왕실그릇과 은수저, 포크, 나이프 등 은제집기는 2017년 가을에 경운박물관 대한제국 전시에 멋지게 전시되었다.


이혼 후 줄리아는 명휘원 시절에 키운 명자와 줄리아 숍을 운영하며 복지사업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1995년 딸 은숙이 사는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하와이는 이구 황세손이 이스트 웨스턴 센터와 여러 건물들을 설계하며 신혼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줄리아가 하와이로 떠난 이후에도 나는 3월 18일 줄리아의 생일이면 국제전화로 축하 노래를 꼭 해주었고 수시로 전화해서 안부를 묻곤 하였다. 줄리아는 2000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함께 다큐멘타리도 찍고 조선왕가의 유물과 사진을 덕수궁박물관에 기증하였다. 2005년 이구 황세손의 국장에는 비록 초청은 받지 못했지만 낙선재를 거쳐 장지로 떠나는 장례행렬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남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기에 줄리아가 주관하여 정동에 있는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황세손을 위한 연미사를 함께 드렸다.

내가 하와이를 가끔 방문하기도 하였다. 2014년 아들 내외와 손주와 함께 하와이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며 줄리아와 함께 미사도 드리고 중국식당에서 식사하기도 하였다. 2016년 10월 하와이 요양병원에 방문했을 때 많이 쇠약해진 줄리아는 처음에는 멍하니 있다가 나를 알아보고 "이건 기적이야."라고 중얼거리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작년 11월 26일 줄리아 여사가 94세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일주일 지나서 내게 전해졌다. 비록 이혼하였지만 끝까지 왕실의 며느리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줄리아의 죽음을 그대로 묻히게 둘 수는 없었다. 중앙일보에 이 소식을 알렸고 결국 거의 모든 언론들이 ‘영친왕의 미국인 며느리 별세’라는 기사로 다루어 주었다. 줄리아가 황세손의 연미사를 드렸던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줄리아를 위한 연미사가 봉헌되었다. 어찌들 알고 오셨는지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성당을 가득 채웠다. 사랑하는 한 남자를 따라 먼 이국 땅에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줄리아의 삶이 고독했지만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어 기뻤다. 자신을 애도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하늘나라에서 줄리아도 기뻐하셨으리라.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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