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최경자 1911~2010, 국제패션디자인학원 명예이사장)를 아는 분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너무 일에만 열중하시는 것을 염려하여 “이제는 자녀들에게 일을 맡기고 좀 편안히 쉬시지요...”라고 권유하기를 여러 번.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으레 “그러기는 해야겠는데...”라면서 말꼬리를 흐리고 미소로 넘기면서 이내 또 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다반사였다. 어머니는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분이시고 거기서 삶의 보람을 느끼셨던 분이다. 패션계에 몸을 담으셨던 80여 년 동안을 한결같이 하나의 일이 끝나면 또 다음 일을 계획하면서 일 속에 파묻히고, 그렇게 어머니는 일의 모든 과정을 사랑하며 그 과정 속에서 보람을 영글어 가셨다.
여섯 식구를 보살피고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주부로서, 또 천직인 양장의 명맥을 이어가는 디자이너이자 교육자로서, 어머니의 길은 험하기 짝이 없었다. 유학 시절 고향집에 화재가 나서 귀국해야 했을 때에도 피아노를 팔아 재봉틀을 사셨고,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대구로 피난을 갔을 때에도 모두가 기피하던 흉가를 저렴하게 임대해서 ‘국제양장사’를 운영하시는 등 그 맥을 이어간 어머니는 ‘ 칠전팔기’ 그 자체이셨다. 어머니는 역경에 처할수록 기적 같은 힘이 솟으시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힘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우러나왔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동안 우리 곁에서 새겨 놓은 크고 작은 발자취는 결코 신기한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처럼 어머니가 일념을 가지고 실천력을 발휘했을 때 그 문은 열렸고 믿는 그 자세에 은혜가 깃든 것이었다.
불모지였던 한국 패션계에서 단순한 바느질쟁이가 아닌 패션 디자이너를 양성하겠다는 어머니의 일념을 허황된 꿈이라 치부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 최초로 전문적인 패션 교육 기관인 국제복장학원을 창립하고, 모델 스쿨을 만들고, 패션전문잡지를 창간하는 등 선구자의 길을 개척할 때마다 많은 반대에 부딪히고 난관도 있었지만 그들의 편견에 얽매이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