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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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의 기록과 기억

언론매체 :경운박물관 | 게시일게시일 : 22-11-2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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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을 좋아한다. 특히 꽃이 필 때, 단풍이 필 때의 궁은 먼 데로 떠나는 행렬을 비웃을 만하다. 모든 궁이 아름답지만 창덕궁의 후원은 적요한 기품이 그득해 기둥 하나에도 눈과 맘이 머운다. 이 공간을 스쳐간 아득한 역사가 잠시 콧등에 내려앉는다. 아름다운 부용정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온다. 다 스러지는구나, 다 지나가는구나. 지금 이 순간만이 진실이구나. 불현듯 흔해 빠진 단풍빛도 처음 본 듯 펄쩍 뛴다. 곁에 있는 당신도 고마워 눈맞춘다. 궁에서는 이처럼 모든 역사는 지나간다는 걸 빛바랜 단청도 속삭여 나는 현재를 더욱 열렬히 감각하고 마는 것이다.

궁을 사랑하는 나는 전생에 무수리였나 웃곤 했다. 해질 무렵 창덕궁 낙선재 마루에 앉아서는 왕가의 쓸쓸한 마지막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떤 왕조든 권력의 마지막은 씁쓸한 것이나 나는 예우와 예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역사가 바뀔 때, 혁신이 이뤄질 때, 변화와 성장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기본과 중심 또한 지켜져야 하는 것이므로. 그래서 나는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서로를 예우하고 삶에 예의를 갖추기를 바랬다. 당연한 도리지만 그 당위가 지켜지는 일은 순탄하지 않다. 바쁘고 빠르게 성장하느라 지나온 길을 돌아볼 여유가 우린 없었으니까.

인상으로 짐작하기 싫다. 인성은 겪어봐야 아는 것이므로. 그런데도 살아보니 사람의 얼굴은 참 많은 말을 하고 저절로 그의 마음이 드러나있기도 하다. 나는 언젠가부터 조금 큰 거울을 휴대하고 다니며 종종 표정을 확인한다. 무기력하고 지친 중년 여인이 튀어 나올까봐 잘 달랜다. 오늘 만난 이준 선생님은 인상으로 이야기하는 분이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이고 의친왕의 손자이신데, 말하지 않아도 기품이 느껴졌다. 그간의 고생과 어려움, 쓸쓸함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셨다. 말씀 안하셔도 깊게 패인 주름들이 대신 말하고 있었다.

ㅡ이제는 제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을 안아주게 된 것 같아요.

황손이라는 무게, 사회의 무심한 시선 등에 오히려 원망도 있었을 법한데, 눈빛이 온화하시다. 격동의 삶을 살아낸 사람, 깨달은 사람의 지혜가 고스란하다. 지금 경기여고 경운 박물관에서는 의친왕 기념 사업회의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 운동> 기록과 기억展이 열리고 있다. 내내 궁을 좋아하고 사랑했더니 황손과 만나 함께 하는 시간을 선물받은 것 같다. 게다가 그동안 몰랐던 역사와 그 안의 사람 이야기가 찡하고 감동이다. 경운 박물관 크지 않은 전시실이 우리나라 마지막 황실의 역사와 소소한 일상까지 모두 보여준다. 황실의 독립 운동 이야기부터 작은 비녀, 가락지 하나까지. 새롭게 알게 된 역사도 너무 많아 그동안 우리는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각성과 함께 나도 모르게 기록해주세요! 더 잊혀지기 전에 기억하는 모든 이야기를 꺼내놓아 주세요! 간곡히 청했다. 이준 황손님이라면 고조곤히 이야기하고, 있는 그대로 기록해줄 수 있는 분인 것 같았다.

지금을 사느라 너무 바빠 어제는 잊은 듯 산다. 현재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과거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하지만 우리의 중심을 세우고 본령을 알아채는 일이라면,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고 통찰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의친왕이 어떤 분이고 어떤 세상을 꿈꿨는지. 그리고 그의 자손 이준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가만히 여쭤보니 역시나 욕심도 없으시다. 인사동에 있었던 사동궁을 복원하는 게 꿈이라고 하시며, 그냥 사람들 마음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조금이라도 아름다웁게 남기를 바라는 마음 그거면 됐다고 하신다. 집에 와서 정성이 가득한 전시 도록을 넘기자 아득한 역사가 만져질 듯 선명해진다. 우리에겐 이처럼 삶의 구체가 필요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우주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깊고 넓은 강처럼 유구한 역사의 물길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오늘 뵌 이준 선생님께 마지막 황실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쫄라야겠다. 가만 가만 웃을듯 말듯 맑은 눈으로 얘기해 주실 게 분명하다. 

 

임지영 (예술칼럼니스트 /즐거운예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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